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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도 엄은솔의 화면은 놀라울 만큼 고요하다. 깊은 물속에서도 인물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거센 불길 앞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이어간다. 실내는 어느새 산과 바다로 확장되고, 현실과 환상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의 회화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또 다른 질서를 직조한다.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현실이고 환상인가를 가르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함께 존재하는지를 바라보는 일이다.

     

    작가는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을 품어주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물은 모든 것을 삼키고 불은 모든 것을 태우는 절대적인 힘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 앞에서 동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는다.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화면 속에서 '흐르지 않는 물'과 '번지지 않는 불'이라는 역설적인 풍경으로 드러난다. 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불은 번지지 않는다. 엄은솔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연을 회화라는 장치 안에 담아 둠으로써, 결코 머무르지 않는 대상을 곁에 두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이 세운 그 경계는 끝내 허상에 불과하며, 고요한 정경은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향한 이러한 시선은 전시의 주축이 되는 회화를 중심으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자화상 연작과 드로잉을 통해 또 다른 결로 확장되며, 서로 다른 형식의 작업들은 인간과 자연, 현실과 환상이 만나는 순간을 각기 다른 거리에서 응시하며 하나의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

     

    《흐르지 않는 물, 번지지 않는 불》에서 물과 불은 인간이 끝내 붙잡을 수 없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이 빚어낸 풍경이다. 거대한 힘 앞에서 인물들이 보이는 평온함은 저항도 극복도 아니다. 오히려 삶의 일부로 그 힘을 받아들이려는 조용한 몸짓에 가깝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풍경 속에서 엄은솔은 인간이 세계와 조우하는 순간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엮어내며, 그 만남의 흔적을 화면 위에 기록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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